"지옥문이 활짝 열렸다. 이 지옥문을 누가 닫을 것인가? 닫는다고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국회의원 사용법 칼럼]③ 박인숙 울산의대 명예교수·전 국회의원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의료 국가비상사태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이 너무나 조용하다. 폭풍전야의 고요함인지 아니면 그냥 무기력, 무의식 상태인지 알 수 없다. 

지난 2월 윤석열 대통령의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발표 이후 전공의들이 의료 현장을, 학생들이 대학을 떠나면서 필수의료가 멈춰 섰고 환자들과 의사들, 병원 경영자들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전공의가 없다고 빅5병원들이 멈추고 직원들이 권고사직이라는 날벼락을 맞고 있다. 총선 때문에 이 사단이 시작됐다고 모두들 의심한다. 하지만 이제 선거가 여당의 참패로 끝난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이런 ‘의료 농단’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도 없고 갈등만 깊어지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해결은 더욱 요원해 보인다. 

이 사태가 조만간 끝나지 않으면 세계가 부러워하던 대한민국 의료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될 것이며 의사들과 국민이 입은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 지날수록 회복이 어려워질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정서적 트라우마는 금전적 손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비가역적이고 오랫동안 지속될 심각한 피해인데, 대통령과 정부만 모르는 것 같다. 아니, 애써 외면하려는 것 같다. 

국민과 환자들이 의사를 '돈만 밝히는 매정하고 이기적인 집단'으로 매도하면서 의사들이 국민의 원성을 온몸으로 받고 있다. 이 뿐 아니라 정부가 의사들을 향해서 퍼붓는 온갖 능멸과 협박 때문에 그리고 사법부의 공정성과 형평성을 잃은 듯한 수많은 불리한 판결로 인해 의사들이 국가와 국민 모두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배신감, 상실감, 허무감이 크고 깊어서 회복이 과연 가능할 지 의문이다.

이 사태가 언젠가 수습되더라도 의사들이 전처럼 성의껏 환자를 치료해주고 싶은 마음이 되살아날지, 또한 환자들도 의사에 대한 존중과 신뢰가 회복될지 매우 회의적이다. 사실 국민과 의사 모두의 이러한 심리적 변화가 가장 심각한 문제다. 그래서 ‘지옥문이 열렸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라는 극단적인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국민, 의사, 정부 삼자 간 불신과 원망이 회복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고 있는 와중에 학생, 전공의, 교수, 개업의, 봉직의, 병원 경영자 등 각 영역별 의사들 간의 이견으로 인한 불협화음까지 불거져 나오면서 사태 해결이 더욱 꼬이고 있다. 게다가 더욱 심각한 것은 빠르게 나빠지는 병원경영 때문에 애꿎은 직원들이 갑자기 직업을 잃을 위기에 처해있고 연관 산업과 지역 경제까지 영향을 받으면서 윤 대통령이 시작한 ‘의료농단’으로 인한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며 재앙수준에 이르고 있다.   

이제 5월 31일이면 제22대 국회에서 새로 선출된 의원들의 활동이 시작된다. 정부의 직무유기와 포퓰리즘, 그리고 의사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오래 방치돼온 정책들은 아주 많다. 잘못된 정책들은 관행이 돼 굳어버린 실타래 같은 난제들로써, 이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곳은  국회 뿐이다.

이번 22대 국회에서 역사상 가장 많은 8명의 의사 출신 국회의원들이 당선됐다. 소속 당도 보수, 진보 모두를 아우르고 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과감한 제안을 한다. 

의대 정원 증원은 윤석열 대통령이 주장했지만 사실 여야 모두 암묵적으로 동의한 이슈였다. 이제 국회에서 의사 국회의원들이 주축이 돼 보건의료에 관심이 많은 의원들, 그리고 현장 경험이 풍부한 바이탈과 의사, 교수, 시민단체, 법률가들을 포함한 초당적 기구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 이 난제를 해결할 물꼬를 터야 하는데 의대정원 2000명 증원과 필수의료 패키지 모두를 원점에서 전면 재검토해야 함은 물론 과거 정부에서 표를 얻기 위해서 무차별적으로 펼쳤던 각종 정책들도 원점에서 하나씩 바로잡는 계기가 돼야 한다. 

대한민국 의료는 어느 기준으로 봐도 이미 최고 수준에 도달했지만 되돌아보면 사실상 겉만 화려한 사상 누각이었던 셈이다. 결국 가장 약한 고리부터 무너지기 시작해서 의대증원 2000명이라는 불씨 하나가 연쇄 폭발을 일으켜서 지금 화약고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이번 ‘의료 농단’ 사태를 1989년 전국민 건강보험시대가 시작된 이후 가장 중요한, 처음으로 맞이한 의료시스템의 대변혁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동안 방치되고 누적돼 왔던 수많은 기형적인 제도를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나하나 근본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물론 이 모든 문제의 가장 기본은 터무니없이 낮은 필수의료에 대한 건보 수가이므로 이를 정상화하는 것이 의료 개혁의 시발점이 돼야 한다. 또한 이번 일을 계기로 보건복지부는 2010년 법 제정 이후 한 번도 지키지 않았던 보건의료기본법에 따라서 의사 뿐 아니라 간호사, 약사, 의료기사 등 모든 보건의료 관련 인력의 중,장기 수급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즉 이번 사태를 대한민국 의료의 백 년 대계를 전향적으로 설계하는 전화위복의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서 한 가지 명확하게 짚어야 할 부분이 있다. 흔히 건보수가를 올려준다고 하면 국민적 저항이 있을 수 있는데 이는 명백한 오해다. 필수의료 건보수가를 올려준다고 해서 의사들의 수입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건보수가를 올려 줌으로써 필수의료에서 전공의 의존도를 낮출 수 있고 이것이 바로 필수의료 정상화의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고쳐야 할, 각종 태생적 모순을 내포한 보건의료 정책들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으나 그중 큰 주제들을 몇 개 든다.  

1. 고정된 금액의 건보 재정을 가지고 ‘더 심하게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기 보다는 더 많은 숫자(즉 더 많은 수의 유권자)의 ‘덜 아픈’ 사람들의 표를 얻을 수 있도록 설계된 건보 수가 정책을 과감하게 개선해야 한다. 이런 류의 대표적 포퓰리즘 사례가 ‘문케어’ 이다. 

2. 원가의 70%에 불과한 필수의료 건보수가 인상은 가장 우선돼야 하는 개선책이다.  

3. 브레이크 없는 과다한 의료 이용 행태를 개선해야 한다. 일차의료 전달체계 개편이 그 방안의 하나다.   

4. 낮은 건보수가를 메우기 위해 등장한 비급여 진료를 무조건 억제하겠다는 정부 발상이 틀린 것이다. 건보수가 인상이 우선돼야 하는데 앞,뒤가 바뀌었다. 

5. ‘바이탈 과’ 전공의 수급을 병원의 필요에 꿰어 맞추는 방식을 버리고 대신 인구구조의 변화에 따른 적정 수요에 맞추는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  

6. 바이탈과 건보수가를 올려줘야 한다. 전공의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이번에 전공의들이 떠나니 빅5 병원들이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른 이유가 바로 바이탈 과의 건보수가가 너무 낮기 때문이다.

7. 기형적인 의료 행태에 편승해 영업이익 극대화를 목표로 하는 사보험의 팽창에 대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그래서 전 국민의 의료비 급상승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8. 건강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 구성에 변화가 필요하다. 지금과 같은 구성원으로는 협상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호 모순되는 제도들이 실타래처럼 엉킨 기형적 구조가 그 이면에 존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만 본다면 우리나라 의료는 서비스 만족도, 병,의원 이용횟수, 전문의 접근성, 의료의 질, 평균수명, 암 치료성적 등 거의 모든 보건의료 지표들에서 세계 최고수준에 도달했다. 그런데 이번에 의대정원 2000명 증원이라는 윤 대통령발 불씨 하나가 방아쇠를 당겨준 결과, 불안했던 화약고가 결국 대폭발을 일으킨 것이 이번 ‘의료 농단’ 사태다. 

모처럼 의사 국회의원이 여럿 선출된 이번 22대 국회가 (‘윤석열 대통령이 말하는 의료개혁’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의료개혁’의 절호의 찬스이다. 이는 국가 보건의료의 백년대계를 새로 만드는 일인 만큼 초당적 협력이 필요하다. 이제 선거는 끝났고 다음 선거는 4년 후의 일이다.

특히 의사 출신 국회의원들은 향후 공천에서의 유불리를 초월해야 하고, 의사로써, 그리고 국민을 대표하는 선출직 의원으로써의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시간이 걸릴 것이고 의료인들도, 국민도 어느 정도의 양보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빚을 미래 세대에게 넘기지 않으려면 어떤 정책이 지속 가능한 최선책인지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불씨 하나 때문에 화약고가 완전 폭발해서 모든 것이 잿더미로 주저앉은 지금 의료현장을 다시 재건축해야 한다. 대신 이번에는 과거 1970~1980년대 국가건강보험을 처음 시작할 때처럼 급하다고 부실공사를 해서는 안 된다.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꼼꼼히 점검하면서 후손들에게 지속가능한 튼튼한 집을 남겨주도록 올바른 개혁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문제가 많은 미국식이나 영국식 의료제도에서도 우리가 취할 부분은 취하고 또한 다른 의료 선진국들의 제도를 참고하되 우리 국민들께 특화된 국가건강보험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공룡’ 실손 보험과도 조화를 이루면서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보건의료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소중한 의료제도가 더 붕괴하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이 ‘의료농단’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 늦었지만 그래도 지금이 건국이래 모처럼 맞이한 골든 타임이다. 시간이 없다. 지체할수록 회복이 더 어려워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환자이든, 의사이든 국민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다. 지옥문을 닫아야 한다. 결자해지가 필요하다. 


※칼럼은 칼럼니스트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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