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수과 보호와 선의의 의료행위를 이어가기 위해 '의료분쟁처리 특례법' 제정돼야

[대선 후보들에게 제안하는 보건의료정책 어젠다]② 이로운 대한의사협회 홍보이사 겸 부대변인

대선 후보들에게 제안하는 보건의료정책 어젠다

제20대 대통령선거가 내년 3월 9일로 다가왔습니다. 각 후보캠프들이 여러 단체들로부터 정책 제안을 받아 대선 공약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메디게이트뉴스는 대통령 후보라면 반드시 짚어야 하는 보건의료정책 어젠다(agenda)를 사전에 심도 있게 살펴보고 이를 대통령 후보들의 공약과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의료계 전현직 리더들의 릴레이 칼럼을 게재합니다. 의료계가 각종 악법에 대한 방어에만 급급할 게 아니라, 선제적으로 꼭 필요한 정책을 제안할 수 있도록 의료계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①이철호 전 의협 의장 "일차의원과 중소병원 특별법·의료전달체계 정립·수가현실화"
②이로운 의협 홍보이사 "의료분쟁처리 특례법 제정"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2020년 모대학병원 교수님이 대장암이 의심되는 장폐색 환자에게 장 정결제를 투여해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에 대해 법정 구속처분이 내려지고 구치소에서 54일간 구속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또한 2018년 10월에는 8세 소아환자의 사망으로 담당 의사가 법정 구속됐으며, 2017년에는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집단 감염 사망 사건으로 소아과 교수가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진료 과정에서 발생한 불가항력적인 결과들로 의료진이 법정 구속되거나 실형이 선고되는 일들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환자가 사망한 사건에 대해 유족들의 슬픔을 이해하고 주장을 충분히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것이 의료진에 대한 직접적인 형사처벌로 이어지는 것은 법리적 관점과 더불어 선의를 위해 의료행위를 행한 의료인을 환자에게 사망이나 장애가 발생했다는 결과론적인 관점으로 판단해 처벌했다는 점에서 재고될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외국 의사와 온라인으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너희 나라는 왜 이렇게 의사를 처벌하기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의사가 구속(arrest)되거나 감옥(jail)에 갔다는 이야기를 인터넷 뉴스를 통해 보았는데, 자신의 생각으로는 너무 생소하고 이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의사 구속 및 처벌과 관련된 해외의 사례를 찾아볼 때 북미 선진국에서는 의사가 구속되거나 실형을 받는 경우가 매우 드문 것으로 확인됩니다. 후마윤 초드리(Humayun Chaudhry) 세계의사면허기구연합회 사무총장과 리사 브라운스톤(Lisa Brownstone) 캐나다 온타리오주 의사면허기구 수석변호사는 한목소리로 "캐나다와 미국에서 의료과실로 형사소송을 당하는 의사는 없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미국이나 캐나다의 경우 의사가 환자에게 성범죄를 저지르거나 살해 의도를 가지고 해치지 않는 이상 의료과실로 형사소송을 당하거나 심지어 구속되는 경우는 없다"고 이들은 이야기했는데, 우선 근본적으로 미국과 캐나다와 같은 선진국은 의료과실을 민사소송이나 의사면허기구가 개입해 해결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제가 좀 더 조사해본 바로도 캐나다는 지난 100년동안 의사에 대한 15건의 기소 중 단 1건만 형사처벌이 이뤄졌습니다. 마취과 의사가 마취 도중에 안전 장치의 일부를 끄고 수술방을 나간 후 연락이 두절돼 환자가 사망해 기소된 것인데, 해당 의사는 과실을 인정했고 스스로 유죄를 시인했습니다. 이것이 형사처벌된 유일한 1건이었습니다.

저는 의료사고로 환자 피해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구제하고 의료인에게 보다 안정적인 진료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고의나 의학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의료행위를 제외하고는 형사처벌을 면제하는 ‘의료분쟁처리특례법’의 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의사는 환자에 대해 최선을 다해 진료하지만 의사 또한 전지전능한 신이 아닙니다. 어떤 의사라도 직업 수행 과정에서 능력과 판단에 한계점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현재와 같은 판례가 계속 유지된다면 수술이 상대적으로 많은 흉부외과, 신경외과 등을 포함한 필수과 의료진의 경우 형사처벌에 노출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잘 아시다시피 모든 의료행위는 선의로 이뤄지지만, 수학적인 셈이나 행정과 같은 예측 가능한 결과가 도출되는 단순한 영역이 아니기에 수많은 가능성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의료사고가 발생했을 때 해당 환자를 진료한 의사들은 최선의 진료를 했을 것입니다. 그 어떤 의사도 고의로 환자의 신체를 훼손하거나 사망에 이르게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선의에도 불구하고 고의성과 악의를 근거로 하는 형사사건과 동일한, 또는 더욱 가혹한 잣대로 의사들을 구속하고 실형에까지 이르는 판결을 하는 것은 다시금 생각해 볼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저는 무조건 의사가 의료사고에 따르는 형사책임에서 면책돼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명백한 과실’ 또는 ‘고의’가 발견된다면 형사처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의료행위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 중 사망을 포함한 심각한 결과의 도출이나 비의도적인 실수를 근거로 무분별한 형사처벌을 하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의 장정결제 투여 후 발생한 환자 사망 사건에서 해당 교수님은 의학적 판단 하에 환자를 진단하기 위한 전처치를 수행하다가 환자가 사망에 이르렀고, 환자와 유족에게 마음 아픈 결과가 초래되긴 했으나 선의에 근거해 최선의 진료를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의사를 처벌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런 사건을 막기 위해 과도하고 강한 처벌을 하는 것이라면, 처벌을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의료제도를 개선하는 노력이 선행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할 것으로 보입니다.

궁극적으로 이를 방지하기 위한 제대로 된 법안이 나오지 않으면 선한 의도로 환자를 도우는 의사들은 방어진료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또한 필수과에 대한 전공의 지원은 점점 더 감소할 것입니다. 이미 최근 전공의 지원에서도 흉부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등의 필수과는 대부분 전공의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심각한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런 부분을 뒤로 하고서라도, 특정 의료인을 의료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을 이유로 신체 구속하거나 실형을 선고한다면 이를 통해 발생하는 의료자원의 소모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최근 법정 구속되거나 실형을 선고받는 의사들은 대부분 내과, 외과, 흉부외과 등 필수 전문과 의사들입니다. 이런 의사 한명이 진료할 수 있는 진료의 수용능력이 있는데, 법정 구속하거나 실형을 사는 동안 해당의사가 진료할 수 있는 진료수용능력, 즉 보건자원이 낭비된다는 점 또한 쉽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의료사고에 대한 특수성을 감안한 법률 신설이 절실하며, 이러한 법률에 대한 논의와 법률 제정을 차기 대통령 후보들께서 보건의료정책 어젠다에 포함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이는 환자의 피해를 공정하게 구제함과 더불어 의료인을 법적 처벌에 대한 두려움에 근거한 소극적인 의료로 내몰지 않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와 동료들은 이런 법적인 보호가 전혀 없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도 매일 의료의 현장으로 나아갑니다. 피가 튀고 질병으로 얼룩진 의료 현장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안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환자의 소생과 안녕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환자 앞에서 물러서는 법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용맹하고 사명감이 투철한 우리 의사들이라고 할지라도 의료사고 처리 특례법과 같은 법적인 보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의료 사고로 인한 형사처벌로 인해 한명 한명씩 의업의 길로부터 멀어지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들은 모두 많은 환자들을 살리고 국민 보건 증진에 기여할 수 있는 소중한 의료 자원들임을 대선 후보들께서는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이와 같이 선의를 근거로 최선을 다해 환자들을 보살피고 있는 의사들의 진료 환경 보장을 위해 ‘의료분쟁처리 특례법’ 은 반드시 제정돼야 합니다. 


※칼럼은 칼럼니스트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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