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치 2조→700억…디지털 치료기기 선두 주자 ‘위기’ 왜?

美 ‘페어 테라퓨틱스’ 자금난에 매각∙청산 등 대안 모색…보험 적용 못 받고 의사∙환자도 ‘낯가림’


[메디게이트뉴스 박민식 기자] 미국 디지털치료기기(Digital Therapeutics, DTx) 업체인 페어 테라퓨틱스(Pear Therapeutics)가 시장에 매물로 나와 충격을 주고 있다. 페어 테라퓨틱스는 세계 최초로 디지털 치료기기를 개발한 디지털 치료기기 업계 글로벌 선두주자다. 

국내 디지털 치료기기 전문가들은 페어 테라퓨틱스의 위기 원인을 출시 제품들이 보험 적용에 어려움을 겪은 데다, 처방 및 이용 편의성 측면서도 의사∙환자들을 끌어들이는 데 실패한 탓으로 분석하며 국내 업계도 이번 사례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21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페어 테라퓨틱스는 지난 17일(현지시각) 보도자료를 통해 매각, 합병, 자산매각, 기술이전 등을 포함한 전략적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회사 측은 매각, 합병 등이 여의치 않을 경우 조직 개편, 청산, 구조조정 등의 조치가 필요할 것으로 내다봤다.

영업손실 누적되며 매각 나서…'2조' 기업가치 2년새 곤두박질

디지털 치료기기업계 대표 주자인 페어 테라퓨틱스가 회사를 매물로 내놓게 된 것은 영업손실이 지속적으로 늘어난 데 따른 것이다. 

페어 테라퓨틱스는 지난해 3분기까지의 매출이 1010만 달러(한화 약 131억원)로 전년 동기 280만 달러 대비 크게 늘었지만, 영업손실이 9400만달러(한화 약 1220억원)로 매출을 크게 웃돌았다. 지난해 3분기까지 누적적자는 약 3억 달러(한화 약 3900억원)에 달했다.

자금난에 시달린 페어 테라퓨틱스는 지난해 두 차례에 걸쳐 총 80여명을 해고하며 허리띠를 졸라맸지만 상황을 반전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 치료기기는 의학적 장애나 질병을 예방∙관리∙치료하기 위해 환자에게 근거 기반의 치료적 개입을 제공하는 소프트웨어 의료기기를 뜻한다. 기존 치료제들에 비해 낮은 부작용 우려, 낮은 한계 비용, 높은 접근성 등의 장점이 있어 의료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올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 중에서도 페어 테라퓨틱스는 디지털 치료기기 업계 선도 기업으로 입지를 다져왔다. 지난 2017년 미 식품의약국(FDA)로부터 세계 최초의 디지털 치료기기인 약물 중독 치료용 앱 ‘리셋(reSET)’의 허가를 받은 데 이어 2018년, 2020년 각각 오피오이드 중독 치료용 앱 ‘리셋-오(reSET-O)’, 불면증 치료용 앱 ‘솜리스트(Somryst)’를 내놨다.

지난 2021년 상장 당시 페어 테라퓨틱스의 기업 가치는 16억달러(한화 약 2조원)에 달했다. 시장의 기대감이 상당했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상장 후 만 2년이 지나지 않은 지금 페어 테라퓨틱스의 시가 총액은 700억원(20일 기준)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빠른 상장 택했지만 보험 적용 '난관'…"샴페인 너무 일찍 터뜨렸다"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지만 페어 테라퓨틱스의 위기는 그간 발표된 실적과 주요 멤버들의 이탈을 통해 어느정도 예견됐었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특히 업계 관계자들은 페어 테라퓨틱스가 너무 이른 시기에 상장을 했다고 입을 모았다. 

웰트의 강성지 대표(의료기기산업협회 혁신산업위원회 디지털 치료기기 분과장)는 “투자자들의 등쌀에 어쩔 수 없었겠지만 페어 테라퓨틱스는 상장을 하면서 축포를 너무 일찍 터뜨렸다”며 “매출을 충분히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매년 1000억원에 가까운 손실을 입으니 아무리 상장사라고 해도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에버트라이 신재용 대표(연세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페어 테라퓨틱스는 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더라도 기업에게 판매하면 된다고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며 “문제는 페어 테라퓨틱스가 기업들을 대상으로 디지털 치료기기가 투입 비용 대비 큰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설득하기 위한 근거 데이터를 쌓는 데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FDA 허가 후 5년이 넘었지만 페어 테라퓨틱스의 디지털 치료기기는 여전히 미국내 일부 공공∙민간 보험사들에서만 제한적으로 보험 적용되는 데 그치고 있다.

주 단위로 운영되는 공공 의료보험인 메디케이드(Medicaid)의 경우 메사추세츠(Massachusetts),  오클라호마(Oklahoma) 등 일부 주에서만 보험을 적용해주고 있다. 이 마저도 가치기반공급계약(Value-based agreement)이라 계약 상의 지표를 충족하지 못하면 받은 금액을 다시 토해내야 한다.

결정적으로 65세 이상 고령층을 대상으로 하는 메이저 공공보험인 메디케어(Medicare)는 아직까지 디지털 치료기기에 문을 열어주지 않고 있다. 

미국 메디케어 및 메디케이드 서비스 센터(CMS)는 지난해 4월이 돼서야 페어 테라퓨틱스의 디지털 치료기기들에 대한 별도의 보험 코드를 도입했다. 코드 도입이 곧 보험 적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향후 보험 적용 여부는 여전히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페어 테라퓨틱스 디지털 치료기기 화면. 사진=페어 테라퓨틱스 홈페이지

의사∙환자 익숙치 않고 코로나도 악재…시장 확산 예상보다 더뎌

이용자 친화적이지 않은 UI∙UX, 처방 과정의 번거로움 등은 시장 확산을 더욱 더디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했다. 디지털 헬스케어 시장의 급성장을 이끈 코로나19 팬데믹도 페어 테라퓨틱스에는 되레 악재가 됐다.

신 대표는 “솔직히 페어 테라퓨틱스 디지털 치료기기의 UI∙UX는 전혀 이용자 친화적이지 않고, 회사가 그걸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며 “자금을 다 써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해할 수 없는 행보였다”고 했다.

이어 “코로나19 팬데믹도 악재로 작용했을 수 있다”며 “비대면 진료가 활성화되면서 의사가 비대면 진료로 직접할 수 있는 일을 굳이 디지털 치료기기로 해야하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대두되며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강 대표는 “보험 적용이 안되는 것에 더해 병원의 처방 시스템과도 연동이 안 돼 의사들의 불편함이 컸을 것”이라며 “의사가 특별하게 큰 뜻이 있지 않는 한 굳이 디지털 치료기기를 처방할 유인이 없었던 셈”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요인들이 한 데 작용하면서 페어 테라퓨틱스가 야심차게 내놓은 디지털 치료기기들은 의료 현장에 빠르게 안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여느 디지털 헬스케어 솔루션보다도 디지털 치료기기에 대한 보험, 의사, 환자 등 이해관계자들의 ‘낯가림’이 심했던 것이다.

실제 페어 테라퓨틱스의 실적 자료에 따르면 2021년 페어 테라퓨틱스의 디지털 치료기기 3개의 처방건수는 1만4000건, 사용률(fulfillment rate)은 51%에 그쳤다. 업계가 기대했던 것에 비해서 시장의 반응은 느렸다.

카카오벤처스 김치원 상무는 “디지털 치료기기는 다른 디지털 헬스케어 솔루션들과 비교하더라도 의사 뿐 아니라 모든 이해 관계자들에게 너무 새로운 제품”이라며 “보험 입장에서도 디지털 치료기기를 약, 의료기기, 의사 행위 중 무엇으로 처리할지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고, 환자도 약이 아닌 앱을 처방받는 것에 대해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결국 도입 과정에서 마찰이 예상보다 더 컸고 페어가 이를 버텨낼만한 매출과 자원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 식약처로부터 국내 최초 디지털 치료기기로 허가받은 에임메드의 '솜즈(Somzz)'. 사진=식약처

국내 시장 던지는 메시지는…"업계 합심해 수가 문제 선결∙다양한 사업 모델 고려"

지난 2월 국내 1호 허가 제품이 나온 가운데 국내 디지털 치료기기 업체들이 페어 테라퓨틱스의 상황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강성지 대표는 미국에서 디지털 치료기기가 보험 수가 적용에 어려움을 겪은 것은 관련 업체들이 합심하지 못 했기 때문이라며 개별 회사의 힘으로는 보험 문턱을 넘기 어려운 만큼 업계가 목소리를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금리 인상 등으로 글로벌 시장 자체가 위기인 상황에서 당장 먹고 살아야하는 다른 기업들이 비처방용으로라도 매출을 내야겠다며 딴 지갑을 차면서 대열이 흐트러진 것”이라며 “국내에선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이어 “국내 시장도 쉽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 웰트에서 1호 디지털 치료기기가 나오면 수가나 병원 정보시스템과의 연동 문제 등이 해결되기 전에 혼자서 섣불리 시장에 출시하지 않고 기다리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며 “수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은 단순히 허가를 받았다는 것만으론 크게 바뀌는 게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김치원 상무는 의사 처방이 필요한 정통 디지털 치료기기의 경우 여타 디지털 헬스케어 제품에 비해서도 시장 안착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며 초기부터 사업 모델을 다양화하는 방안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보험에 올인하는 방법도 있지만, B2C를 노리거나 제약회사들과 협업하는 방법도 있다”며 “무산되긴 했지만 페어 테라퓨틱스 역시 과거에 노바티스 등 제약사들과 논의를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보험만을 고집하지 않는 다변화된 사업 모델을 처음부터 고민해야 한다”며 “페어 테라퓨틱스의 사례는 정통 디지털 치료기기 모델의 경우 다른 디지털 헬스케어 제품들보다도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걸 잘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신재용 대표는 이번 페어 테라퓨틱스의 소식이 국내 시장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디지털 치료기기 업체에 투자한 투자자들 입장에선 불쾌할 수 있는 소식”이라면서도 “국내의 경우 정부에서 바우처 사업도 추진하는 등 강력하게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만큼 큰 영향은 없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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